이용수할머니 2차 기자회견 아카이빙

2020. 5. 25. 18:44보기

 

[이용수 여성인권운동가 입장문 전문]
2020.5.25

저는 위안부였습니다.

그냥 위안부가 아니라 일제강점기, 일본군의 대만 주둔 가미가제 특공대의 강제 동원 위안부 피해자였습니다.

해방 이후 그 누구에게도 밝히지 못했던 제 삶의 상처를 대중에게 공개했던 것이 1992년 6월 25일입니다. 차마 용기를 내기가 어려워 제 자신이 아니라 친구의 이야기인 것처럼 당시 정대협에 거짓으로 피해를 접수했었습니다.

이후 1992년 6월 29일 수요집회를 시작으로 당시의 참상과 피해, 그리고 인권유린을 고발하고, 우리 인류에게 다시는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지 않도록 다른 피해 할머니들과 함께 문제 해결과 인권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서로 간 존재도 몰랐던 우리 피해 할머니들은 각자 겪은 참상과 인권유린을 이야기하며 부둥켜안고 눈물로 아픔을 함께 했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한 투쟁이 30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투쟁을 통해 손가락질과 거짓 속에 부끄러웠던 이용수에서 오롯한 내 자신 이용수를 찾았습니다. 먼저 가신 피해자 언니들과 함께 이 문제를 저 이용수가 꼭 해결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양국 정부의 무성의와 이리저리 얽힌 국제 관계 속에서 그 결실은 아직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번 기자회견과 입장문을 통해 지금까지 해 온 방식으로는 문제의 해결은 여전히 요원하다는 말씀을 감히 국민 여러분께 말씀드리며, 앞으로 개선해야 할 것들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지만 제 기자회견 이후 전개되고 있는 상황은 제가 기대하거나 예상했었던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30년 동지로 믿었던 이들의 행태라고는 감히 믿을 수 없는 일들이 계속 드러나고 있는 상황에서 저는 당혹감과 배신감, 분노 등 여러 가지 감정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저는 두 가지는 꼭 지켜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번 기자회견을 준비했습니다. 저를 비롯한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회복과 일본의 사죄와 배상 및 진상의 공개, 그리고 그 동안 일궈온 투쟁의 성과가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위안부 피해자라는 사실을 고백한 후, 참 힘든 세월을 지내왔습니다만 그럼에도 저는 이 길을 지키기 위해 마음을 부단히 다 잡아 왔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서 국민 여러분께 부탁 아닌 부탁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현재 드러난 문제들은 우리 대한민국이 그동안 이뤄온 시민의식에 기반하여 교정되고 수정되어 갈 거라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래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한 길에 ‘시민 주도 방식’, ‘30년 투쟁의 성과 계승’, ‘과정의 투명성 확보’ 3가지 원칙이 지켜지는 전제하에 향후 제가 생각하는 활동 방향을 몇 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 번째,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이 조속히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가까운 가족에게조차 피해 사실을 밝히지 못했던 많은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현실적이고 실현 가능한 방안을 한일 양국 정부와 시민사회가 책임성을 갖고 조속히 같이 머리를 맞대고 만들어 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두 번째, 지난번 입장문에서도 말씀드렸지만, 한일 관계의 미래지향적 발전을 위한 구체적 교류 방안 및 양국 국민 간 공동행동 등 계획을 만들고 추진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 한일 양국을 비롯한 세계 청소년들이 전쟁으로 평화와 인권이 유린됐던 역사를 바탕으로 인류가 나아가야 할 길을 함께 고민하고 체험할 수 있는 평화 인권 교육관 건립을 추진해 나갔으면 합니다.

네 번째,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전문적인 교육과 연구를 진행하고 실질적인 대안과 행동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구를 새롭게 구성하여 조속히 피해 구제 등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섯 번째, 앞서 말씀드린 것들이 소수 명망가나 외부의 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정대협과 정의연이 이뤄온 성과를 바탕으로 우리 국민의 힘으로 새로운 역량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섯 번째, 이번 사태를 기점으로 개방성과 투명성에 기반한 운영 체계를 갖추기 위한 논의가 이뤄지길 바랍니다. 사업의 선정부터 운영 규정, 시민의 참여 방안, 과정의 공유와 결과의 검증까지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도록 깊은 논의가 이뤄지길 기대합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그동안 이 운동이 시민의 지지와 성원으로 성장해 온 만큼 시민의 목소리를 모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를 비롯한 활동가, 그리고 국민 여러분 모두가 현재 상황을 어떻게 풀어내야 할 지 당혹스러우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투쟁 과정의 문제들이 공론화되길 기대했던 것인데, 여러 가지 문제가 드러나면서 그 과정이 복잡해질 듯 합니다. 제겐 운동 과정에서 많은 도움을 주셨던 여러분이 계십니다. 먼저 한 발을 내디뎌 새로운 길을 열어오신 분들께서 밝은 지혜로 시민과 함께 문제를 풀어낼 수 있도록 도움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저는 올해 93세입니다. 제게 남은 시간은 별로 없습니다. 어떤 이익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피해자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력하게 당해야 했던 우리들의 아픔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그리고 미래 우리의 후손들이 가해자이거나 피해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금 모두가 걱정하고 있는 코로나19바이러스에 대응하는 대한민국 국민은 이미 새로운 길을 만들어나가고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함께 그 길을 닦아나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어느 길에도 오르막과 내리막은 함께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한 걸음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를 위한 모두의 한 걸음을 이제 국민이 함께 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이용수 할머니 2차 기자회견 발언 전문]
2020.5.25

여러분 이거는 전에 처음에 기자회견할 때 있었어. 이것을 읽기는 힘들어. 그래서 이것을 전부 카메라로 찍었으면 좋겠어. 한부밖에 없는데.. (파일로 돌리면 된다는 관계자) 그래서 이것은 이따가 돌면되고..

제가 두 번째 기자회견 합니다. 누구를 원망하고 또 잘못했다하는건 제가 첨에 기자회견할 때 했는데, 너무 ?이 많이 생각도 못하는 것이 나왔습니다. 그것은 제가 생각하기에는 검찰에서 할 일이라고 생각해. 그렇지만 이 정신대 대책 협의회입니다. 정신대 대책협의회는 공장에 갔다온 할머니야. 그런데 공장에 갔다온 할머니들, 정신대가 할 수 있어. 하지만 공장에 갔다온 할머니하고 위안부 아주 더럽고 듣기 싫은 위안부하고는 많이 달라. 공장에 갔다온 할머니는 공장에서 일했지만 위안부 할머니는 간데가 다 달라. 

잠깐 제가 간데를 말씀드릴게. 우리나이로 하면 16살, 만으로하면 14살. 저는 양력으로 됐어. 왜? 그때 성을 갈지 않으면 계급을 안줬어. 그렇기 때문에 성을 갈아서 야수하라?로 갈았어. 그런데 학교도 그때는 일본학교. 제가 3, 4학년까지 다녔어. 가타카나를 알았어. 끌려가서도 대만? 가미가제 부대, 특공대 부대로 끌려가서도 장교가 가타카나로 써줘서 대화했어. 이 군인이 하는 이야기도 피해자라는 이야기를 했어. 그러면 제가 처음듣는 이야기라서,... 이 군인이 이름이 지어줬어. 

야수하라 도시코라고 지어주면서 나도 도시코같은 피해자라는걸 적어줬기 때문에. 히가샤가 뭔고? 몰랐다. 그 후에 겪으면서 생각할 때, 끌려가서 당한건 말로 못해. 제가 쭉 30년 동안 해오면서 미국으로 어디로 다니면서 증언했어. 그러면 제가 확실하고 또 바른말하고 이러니까 정신대 대책 협의회라는 곳을 몰랐어. 그런데 제가 92년도 6월25일, ?할적에 윤미향 간사였어. 29일에 모임이 오라해서 갔어. 어느교회였어. 그날따라 일본 어느 선생님이 정년퇴직하고 돈을 1000엔인가 얼만가 줬다면서 100만원씩 나눠줬어. 

그게 무슨 돈인지도 몰랐어. 그때부터 모금을 하는걸 봤어. 왜 모금하는지 그것도 몰랐어. 따라다니면서 모금하는데 보니까 농구선수들이 농구하는데 기다렸어. 기다려가지고 그 농구선수가 돈을 들고 모금하더라고. 그 돈을 받아오더라고. 그래도 저는 그게 왜 그런줄 몰랐어. 좀 부끄러웠어. 농구하면서 애쓰는데 버젓이 앉아서 농구 끝나고 돈 받는거 봤어. 늦어서 배고픈데 맛있는거 사달라고 하니까 “돈없습니다”. 그래도 그것이 그런가보다 생각했어. 어디가도, 교회가도 돈 주면 그런가보다 생각했는데 그래도 모르고 쭉 30년을 해가지고 나왔어. 

그런데 무엇이냐. 정신대 대책 협의회입니다. 그러면 공장 갓다온 할머니로 해야되는데. 공장 다녀온 할머니는 밀가루로 반죽해서 빚어놓고 속은 맛있고 귀한걸 넣아야하지 않나. 그러면 그 속은 위안부입니다. 그런 그걸 해도 쭉 30년을 저는 그걸 몰랐어. 그저께, 그그저께도 몰랐어. 어제 저녁 가만 생각하니 이것은 왜, 무엇 때문에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 모임이 위안부 생명을 걸어놓고 끌려가는 위안부를 왜 즈그가 정신대할머니 합해서 쭉 이용했나. 저는 그것도 당연한줄 알았어. 어제 제가 생각해보니 이럴수가 있나. 30년동안 앉아서 이야기하는게 사죄해라, 배상하라는건데 일본사람이 뭔줄 알아야 사죄하고 배상하죠. 

섞어서 이건 사죄하지말고 안해도된다는거 아니냐. 이걸 30년동안 해가면서도 사죄배상 요구하고 그 학생들까지 고생시켰어. 그 학생들 돈 받아서 챙겼어. 이래서 어제 저녁 한숨도 못잤어. 왜 뭐 때문에 정신대만 하지 즈그가 무슨 권리로 위안부 피해자를 만두 고명으로 사용했나. 이걸 생각하니 저는 자다 일어나서 펑펑 울었어. 왜 이렇게 바보같이 당하면서 여태까지 말도 못했나. 생각하니 “그래, 내일 기자회견에는 이것을 반드시 밝혀야되겠다” 사죄배상 막았잖아. 위안부하고 정신대하고 어떻게 같냐. 위안부는 생명 걸어놓고 죽은사람도 많아. 이런걸 30년을 이용해서 나왔어. 전 결심했어. 내일 기자회견할때는 이것을 반드시 밝혀야겠다. 일본이 그 사람들 바보냐? 

뭣하러 정신대협의회가 위안부를 해당치도 않는데 뭣하러 그사람들이 사죄하고 배상하겟냐. 안한이유를 알았어. 이것또한 무엇이냐. ??? 위안부 할머니들로 팔아먹었어. 내가 왜 팔려야하냐***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우리 부모님들은 남의 집 귀한딸 밤에 그것도 끌고 가서 신주 가미카제 끌고가서 전기고문과 갖은 칼로 몸에 그려서 이렇게 죽여놨어. 이런데 그 군인이 보니까 그 방에 들어가라고 담요 드는데, 군인이 앉았는데. 들어가라해서 안들어갔는데 머리 끌고 질질 끌고 가서 방안에 자물쇠 큰게 달려서. 문 열어서 확 밀었어. 발로 돌덩이보다 더한 군화발. 허리 발길로 차서 엎어졌는데, 너무 배가 찢어지도록 죽도록 아팠어. 잘못했다고 빌면서 살려달라했어. ....

이걸 밝혀줘야하지 않겠냐. 그냥 모여 앉아서 어디갔다왔냐 묻고 그걸로 책을 냈어. 책을 놓고 6500원에 파는걸 봤어. 그래도 그걸 몰랐어. 그걸 책으로 내는줄 모르고 당연한가보다 하고, 미국으로 다니면서 제가 제일이라 생각하고 청원도 하고, 정신대 협의회 박물관 짓는 형무소에 짓는다해서. 박경림씨하고 큰조카하고 저하고 가서 15만원 받고 협의회에서 증언했어. 박물관 대표란 소리하지마라, 창피하다했어. 대표 소리는 안해도 대표 대우는 해줘야하지 않나. 

하지만 끝까지 3/30 제가 전화했어. 미향씨, 이러면 안되지 않나. 그렇지 않으면 기자회견 할란다 했는데. 아주 큰소리로, 당당하게 기자회견 하라해서 제가 5/7 기자회견 한거야. 이런 등등을 하나하나 말 못하겠어. 빨리 생각이 안나. 이래서 제가 기자회견 했는데, 어느날입니다. 여기 와있을거야. 소위, 국회의원으로 나올적에 제가 도와준건 없지만 가보고 ?해야한다는 생각은 했는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저따위 행동을 하는지 모르겠어. 

어느날 저녁에 나갔다들어오니 윤미향이 들어왔어. 너무 놀랐어. 와서 무릎꿇고 무슨말인지 용서해달라해. 뭘 용서해? 뭐라도 가져와야 용서를 하지. 뭘 용서? 보니까 엄청나구나. 그건 검찰에서도 할거고 내가 몇일후에 기자회견 할테니 그때 오라고 했어. 그러고 나갔는데, 나가보니 소위 교수라는사람도 있고 여러사람 있는데 말 안했어. 

뻔뻔시리 차에 내려서 휠체어 탈라니까 도대체 뻔뻔스럽기 짝이 없어. 이런사람이 윤미향 옹호했다해. 뭐야 이건?그래서 윤미향한테 기자회견할테니까 오라햇는데 거기서 무슨 원수 진것도 아니고, 30년 지내왔어. 한번 안아달라하더라. 그래서 제 생각에, 그래 이게 마지막이다. 하는 생각에 안아주니 저도 인간이야. 30년 같이 있던 사람,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너무 (기침) ... 이걸가지고 기자님들 부탁드려. 명백하게 기사좀 내줘. 그걸가지고 용서했다, 이런기사 너무 황당해. 

그게 아니야. 이건 확실하고 명백히 여러분들도 책임지는일이야. ..... 자기 마음대로 뭐든지 하고싶으면 하고 팽기치고 하는데 어떻게 30년 같이 했는데 맘대로 팽기쳤어. 우리 국민들, 세계 여러분들이 그 대모에 나왔어. 그분들도 다 아무것도 아닌거처럼.. 이래놓고 자기가 사리사욕 채우려고 마음대로 국회의원 비례대표 나갔어. 저는 몰라. 

이야기도 없었고 자기마음대로 하는거니까 제가 무엇을 용서 구해? 이름도 성도 없는 용서? 자기마음대로 하든지말든지 하는건지 용서를 뭣 때문에 용서 바래. 그거 아니라도 여러 수십만가지를 제가 말씀 못드려. 속이고 이용하고 재주는 곰이 하고 돈은 ?이 받아먹었어. 이런것도 모르고 무엇을 용서해.

저는 대모 방식을 바꾼다는거지 끝내는건 아니야. 김학순 할머니가 시작했고 또다시 새롭게 학생들한테 교육적인 이걸 하기 위해 제가 이걸 바꾼다했어. ...... 제가 생각하는겁니다. 일본과 한국을 학생들이 서로 왕래하면서 이게 시간이 오래갈거야. 그래도 알아야한다고 생각해. 뭐 때문에 배상하고 사죄해야하는지 이야기하면.....

대구 유명한 최봉태 변호사가 했어. 그래놓고 지금 윤미향을 밀고 있어. 어느날 아침, 할머니 윤미향 욕하지마세요. 김복동 할머니 ?하지 않습니까. 나비기금이라든지 김복동할머니 이름으로 했다고 할머니 돈이냐. 어

어느날 미국 가기로 했는데 윤미향 모금했어. 600만원인가 했는데, 저한테 하는말이?? .... 모금하라했냐, 간다고 했냐. 등등 많아. 줄줄줄 나온느게 엄청나게 나오더라. 할머니들 팔아서 했으니 왜 위안부 할머니들을 즈그가 했냐. 이거 부정아니냐.

이것또한 죄를 받아야해. 그래도 끝까지 사죄, 무슨사죄냐. 
김복동 할머니는 한쪽눈 실명이야. 한쪽눈 조금 보이는 할머니를 끌고 다녔지. 미국으로 어디로 끌고 다니면서...고생시키고 끌고 다니면서 할머니 이용해먹고. 그래놓고도 뻔뻔시리 묘지가서 눈물흘려. 그건 가짜 눈물이야. 병주고 약주고 하는. 그것도 죄인데 죄 모르고 아직까지. 그것은 다 검찰청에서 밝힐거야. 정신대 협의회에서 위안부 이용한건 도저히 용서 못해. 이것또한 벌 받아야해. 

래서 저는 끝까지 제가 나이 들다보니, 자신 없어. 그런데 우리학생들로 올바르게 가르쳐야한다고 생각해. 한일 학생 교류해야한다고 생각해. 이런걸 하기 위해 가르치키위해 양국간 친하게 지내면서 역사공부해야한다고 생각하고, 이사람들이 꼭 역사 주인이니까, 올바른 역사교육 시켜서 억울하고 누명쓴 우리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할건? 학생이라 생각해. 늦게까지 산게 죄냐. 왜 이런일 당해야하냐. 

죄가 부끄러워. 하늘나라에 가서 할머니들한테 내가 이렇게 해결하고 왔다, 언니동생들 나를 용서해달라고 빌랍니다. 그래서 그걸 생각하니까 너무 미안하다. 저는 하나도 부끄럼 없어. 세계의 여성분들 저희가 위안부지만 여성이라는 두 글자가 너무 미안하고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런것도 좀 미안한 말씀드릴수있을까 했는데, 이 기회들어 모든 여성분들에게 정말 미안합니다. 여자이기 때문에, 이런 누명도 쓰실 것이고 여자이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그런 소리들으실겁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릴건, 교육을 두 나라가 왕래하고 친하게 지내서 역사 알아서 이 억울하고 억울한 위안부 문제를 사죄받고 배상해야, 제가 사죄받아야 위안부 누명을 벗습니다. 그 더러운 소리를 왜 하냐하니까, 미국 들으라고.. 말도 안되는 소리. 

쉼터 지어놓고. 화려하게 지었어. 윤미향, 위대한 대표 아버님이 사셨다고 하더라고. 이런거, 엄청나게 나왔는데 그건 다 검찰청에서 밝힐거야. 이 죄를 모르고 아직도 큰소리하고 있는 이사람들, 죄는 지은대로 가. 꼭 이 죄를 물어서 죄를 살려야해. 이후 두 번다시 이런일 없도록 하기 위해선 벌 받아야한다고 생각해. 기자여러분, 부탁드려. 했던말 그대로 해줘. 없는말 추측해서 하는건 아니야. 

기자 여러분들이 옳은 말씀으로 기사 내주셨으면 두 번다시 이런일 없도록 하기 위해 장소 바꾸자고 했어. 마지막 이야기 드릴라고. 저 지금 정말 죽겠어. 그 좁은데서 하면 코로나 커졌다고 해서 걱정돼. 그래서 큰데로 모셨어. 꼭 기사는 있는 그대로 내줘.(끝)